헤르메스의 날개에 담긴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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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니스트 박영수가 신문 잡지 사보 단행본 등 여러 매체에 발표한 글 모음
분 류 신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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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메스의 날개에 담긴 상징
 
  제우스는 끊임없이 솟아나는 정욕을 채우기 위해 밤낮으로 기회를 살폈다. 그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하늘의 제왕이건만 마누라 헤라의 감시가 만만치 않은 까닭이었다. 아니 어쩌면 헤라의 질투가 제우스의 바람기를 부채질했는지도 모른다.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게 일반적 심리임을 감안하면 그렇다. 때문에 제우스는 구름으로 슬쩍 하늘을 가리거나 숲 속에 숨어서 관계를 가지는 ‘몰래 사랑’을 즐겼다.

  요정 마이아(Maia)와의 하룻밤도 그랬다. 헤라가 잠든 틈을 타서 키레네 산중 동굴로 찾아간 제우스는 행여 들킬세라 재빨리 관계를 맺었다. 이런 운명 탓인가. 제우스의 정기를 받아 새벽에 태어난 헤르메스(Hermes)는 대낮에 벌써 걸어 다닐 수 있었고 제멋대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은 예사이고 거짓말과 음모에도 남다른 술수를 발휘하였다.

  그의 교활함은 아폴론의 소를 훔친 사건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헤르메스는 아폴론의 가축 중에서 50마리의 소를 훔친 다음 증거를 없애기 위해 소의 머리와 발굽을 태우고, 묘하게 생긴 신을 신어 발자국을 따라 좇아오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이 절도사건은 결국 제우스에 의해 밝혀지고, 헤르메스는 궁지에 몰리지만 여기서 또다시 예의 검은 두뇌가 번쩍인다. 헤르메스는 그 이전에 거북의 등껍질을 떼어낸 다음 훔친 소의 창자를 사용하여 일곱 개의 현이 달린 리라를 발명하기도 했는데, 그 리라를 연주하여 아폴론의 환심을 사고 훔친 소 대신에 리라를 주는데 성공한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아폴론이 리라와 소를 교환하는 흥정에 동의했을 때 아폴론이 한눈을 파는 사이에 훔친 화살과 화살통까지 돌려줌으로써 묘한 방법으로 생색을 냈다는 점이다.

  하지만 헤르메스는 신들로부터 미움을 받기보다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공생하는 관계였다. 왜냐하면 그는 자유롭게 돌아다니면서 신들에게 부탁받은 소식을 상대에게 전해주는가 하면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사람들에게 길 안내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가려운 데를 알아서 긁어주는 격이었다.

  그런데 피는 못 속이는 법! 헤르메스는 욕망에 있어서도 자유를 꿈꾸었으며 아버지 못지않게 많은 여신이나 요정들과 관계를 맺었다. 이때에도 헤르메스는 도둑질과 음모를 이용하여 목적을 이루곤 했다. 예컨대 아프로디테를 유혹할 때에는 훔친 황금 샌들을 돌려받으려면 자기와 정을 통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억지로나마 관계를 맺는데 성공했다.

  이처럼 뻔뻔하고 야비한 헤르메스가 어찌하여 신의 반열에 오른 것일까?
  헤르메스는 상업시대의 등장과 함께 탄생한 인간적 신이었다. 재물이라는 개념이 생기고, 부의 축적도 이루어지면서 동시에 쉽게 재물을 빼앗으려는 부류가 등장했으니 바로 도둑이었다. 그런데 고대의 도둑은 집에 몰래 들어가 물건을 훔치기보다는 다른 곳으로 장사하러 가는 상인이나 여행자를 대상으로 한 노상강도가 더 많았다. 그게 더 실속이 있었던 까닭이다.

  이들 도둑은 어딘가에 숨어서 기다렸다가 바람처럼 나타나 물건을 빼앗은 다음 재빨리 사라지기 일쑤였으며, 육지이든 바다이든 가리지 않고 출몰했다. 헤르메스는 도둑질의 전성시대를 알리는 상징이자, 강자의 노략질을 합리화하는 신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영원한 강자가 없고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 다시 말해 힘으로 남의 것을 빼앗는 도둑보다 더 무서운 도둑이 있었으니 바로 사기꾼이었다. 이들은 교활한 방법으로 남의 재물을 가로챘으며 남의 것으로 한껏 멋을 부리며 살아갔다. 이런 사기꾼의 행태는 무역이나 교류가 활성화되면서 성행했고 헤르메스의 신화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헤르메스가 도둑의 신이자 상인의 신으로 추앙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헤르메스는 날개 달린 신발과 날개 달린 작은 가죽 투구 모자를 쓰고 다닌다. 여기서 날개는 바람과 같은 자유로움을 상징하며, 신발은 행동을, 모자는 권위를 상징한다.

  무언가를 얻으려면 움직여야 하고, 발은 그 움직임의 주체이다. 그러하기에 신발은 행위와 현실을 상징한다. 이에 비해 모자는 키가 커보이게 만드는 효과를 줄뿐만 아니라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높은 권위를 상징한다. 또한 모자는 두뇌를 보호하는 의복으로 생각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신발과 모자에 왜 날개가 달려있을까? 그것은 더 많은 노력과 더 많은 생각을 하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음을 상징한다. 헤르메스의 날개 없는 신발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무능력이듯 노력 없는 욕망은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음을 뜻하고, 상상력이 없는 빈곤한 두뇌는 경쟁력 없는 낙오자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리스신화는 사기꾼의 술수가 얼마나 치밀한 것인지를 신의 입장에서 보여줌으로써 그것 또한 능력임을 일깨워주고 있다.

  헤르메스는 뱀 두 마리가 엉켜있는 지팡이를 갖고 다니는데, 여기서 지팡이는 신의 능력이 가득한 권위의 상징이자 서로 균형을 이루며 대치하고 공존의 평화를 상징한다. 아폴론으로부터 선물 받은 지팡이는 목축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도구이기도 하므로 방어의 의미도 있다.

  헤르메스는 여행자의 신으로도 그리스․로마인들로부터 숭배되었는데, 이는 헤르메스가 길가의 돌들을 깨끗이 치워준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하여 그리스․로마인들은 헤르메스의 얼굴을 새긴 돌을 이정표로 곳곳에 세웠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 이정표는 발기한 상태의 남성 성기 모양으로 변했다. 남성우월주의문화에 따른 남근 숭배가 스며들어 아들을 기원하는 주술신앙으로 변질된 것이다.

  한편, 프랑스의 유명한 가죽제품 브랜드 ‘에르메스’는 그리스 신화와 아무 관계가 없다. Hermes 철자 자체는 똑같지만 19세기 중엽 유럽에서 솜씨 좋은 갖바치로 소문났던 창업자 파리에 티에르 에르메스의 이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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