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강자 ‘고수’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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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니스트 박영수가 신문 잡지 사보 단행본 등 여러 매체에 발표한 글 모음
분 류 역사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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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강자 ‘고수’에 대한 고찰
 
160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부의 영주(領主)들을 제압하고 일본의 패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전국시대가 끝나고 도쿠가와 막부 체제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전쟁터에서 부상당한 채 누워 신음하고 있는 어린 병사가 있었다. 17세 나이의 다케조였다. 그는 몸의 고통보다는 인생의 허망함에 더 괴로워했다. 영웅이 되고 싶어 기꺼이 전투에 참여했건만 돌아온 건 칼부림의 살벌함과 참혹함뿐이었다. 심지어 패잔병으로 쫓기는 신세까지 됐으니 스스로 아무리 생각해도 처량했다.

  그러나 다케조는 도망다니는 과정에서 묘한 결심을 했다.
  ‘일본 최고의 검객이 되자!’

  비록 단체의 일원으로 참가한 전투에서는 졌을지언정 개인 대 개인의 결투에서만큼은 진정한 승자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이후 다케조는 혼자서 무술을 연마한 뒤 전국의 이름난 고수들을 찾아다녔다.

  살기등등한 다케조의 칼 앞에 제법 칼 잘 쓰던 무사들이 하나씩 쓰러져갔고, 그에 따라 다케조의 이름도 조금씩 유명해졌다. 자신감이 생긴 다케조는 더 큰 결심을 했다. 당대 최고의 검객으로 손꼽히는 야규 무네요시와 맞대결을 하고자 한 것이다. 무네요시는 ‘세키슈사이’로 불리는 뛰어난 병법가이자 이에야스의 핵심 참모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을 상대한다는 건 무모한 자살이나 같았다. 하지만 100% 이긴다는 보장은 없지만, 지더라도 어차피 한 번 죽을 인생 조금 일찍 죽는다는 생각을 하니 무섭지도 않았다.

  다케조는 세키슈사이를 찾아가 정중하게 결투를 신청했다.
  “한 수 부탁드립니다.”
  표면적으로는 가르침을 청했지만 실제로는 도전을 받아달라는 요청이었다. 당시 무사는 도전을 받으면 당연히 응하는 게 관습이었고, 거부는 패배를 인정하는 행위와 다름없었다. 따라서 둘의 대결은 당연해보였다.

  그러나 세키슈사이는 감기에 걸려 몸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도전을 거절했다. 그리고는 사과의 뜻으로 정원에 있는 작약 한 송이를 칼로 베어 다케조에게 주었다. 그건 누가 보아도 무사로서 가장 수치스러운 패배를 자인하는 행위였다. 처음에 다케조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꽃을 받아든 다케조는 크게 놀라고 말았다. 잘려진 작약 줄기를 보는 순간, 세키슈사이의 검술이 자신보다 뛰어남을 느꼈던 것이다.
  ‘나는 아직도 멀었구나!’
  다케조는 부끄러웠다. 무조건 싸워 상대를 제압하는 것만을 승리라고 생각한 자신이 한없이 작게 느껴졌다. 무술도 그렇거니와 마음에서도 진 것이었다. 다케조는 이때부터 무술은 물론 심신의 수행에도 나섰으며, 이후의 대결에서 단 한 번도 지지 않았다. 알 듯 모를 듯한 고수의 가르침으로 인해 또 다른 경지의 고수로 태어난 것이다.

  오늘날 다케조는 미야모도 무사시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며, 일본의 전설적인 검성(劍聖) 혹은 검신(劍神)으로 추앙받고 있다.

  ‘고수’란 무엇인가? 어떤 분야에서 수가 높은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전문성을 지닌 장인(匠人)이나 마스터(master)와는 그 성격이 다른 상수(上手)의 실력자이며,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절대강자이다.

  고수는 육체적 능력만 뛰어난 것이 아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심리적 혜안(慧眼)을 지니고 있다. 혜안은 육감(六感)과도 연결되며, 서로 대결하지 않고도 승부를 정할 수 있는 것도 고수 특유의 육감(느낌)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고수는 누군가를 가르칠 때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하수에게는 가르쳐줘도 진도가 없고, 어느 정도의 고수라면 단서만 주어도 깨우침을 얻을 수 있는 까닭이다. 일일이 알려줘야만 아는 사람이라면 진정한 고수가 될 수 없는 이치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무사시는 자신의 인생을 <오륜서>라는 한 권의 책으로 정리했는데, 그 책을 보고 깨우침을 얻은 사람도 대부분 고수들이다. ‘시라소니’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전설적인 주먹 이성순과 ‘최배달’로 널리 알려진 극진가라케의 창시자 최영의가 그 대표적 인물들이다.

  시라소니와 최배달은 싸움에 일가견이 있는 최강자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한때 남모르는 고민에 빠졌던 적이 있었다. 1대1 대결에는 자신 있는데 여러 상대와 싸울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답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미야모도 무사시가 쓴 <오륜서>의 한 구절을 보고 무릎을 탁 치며 해결책을 찾았다. 그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혼자서 많은 상대와 싸울 때는 적이 사방에서 덤벼들어도 이것을 한 쪽으로 몰아가며 싸워야 한다. 어떻게 해서든 적을 일렬로 묶어 싸우고, 적의 대열이 일부 허물어지면 그대로 틈을 주지 않고 세게 들어가야 한다.’

  단순해 보이는 설명이지만 고수에게는 대단한 가르침이었다. ‘차례로 한명씩 치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그렇지 못할까?’라는 질문에 대한 명쾌한 해답은 ‘혼자서 여럿을 상대할 때는 절대 둘러싸이지 않도록 하라’였던 것이다.

  또한 대개의 고수는 스승을 통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진리를 터득하는 경향이 있다. 무사시, 시라소니, 최배달 모두 독자적인 수련을 통해 절대 경지에 이른 고수들이다. 이때의 수련은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의지와 도전을 의미하며 동시에 생명의 기운을 느끼려하는데 있다.

  요컨대 고수가 된다는 것은 배움을 통해 기술을 익히는 게 아니라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고수는 뛰어난 두뇌와 고도의 집중력을 지니고 있다. ‘고수’(高手)라는 말의 어원은 바둑에서 수가 높은 사람을 뜻하는 데 있으며, 여기서의 수는 작전능력 및 심리파악을 뜻한다. 쉽게 말해 상대 의중을 파악하여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녀야만 진정한 고수인 것이다.

  1988년 대만 사업가 응창기가 창설한 바둑 올림픽격인 응창기배 제1회 대회는 고수가 왜 고수인지 일러주는 사건으로 유명하다. 당시 한국의 조훈현 9단은 불리하다는 예상을 깨고 중국의 섭위평 9단을 물리치고 우승했는데, 바둑 내용은 조 9단의 대담함이 돋보이는 명국이었다. 조 9단은 그 이전이후를 막론하고 수십년동안 바둑계의 정상을 지키고 있으니 바둑에 관한한 득도의 세계에 접어든 고수인 것이다. 뿐인가. 조 9단은 ‘호랑이 새끼를 기르는 짓’이라는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창호라는 불세출의 천재 기사를 기꺼이 제자로 맞아 큰 인물이 되게끔 했다. 조 9단은 기예와 인품 모두 고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에는 고수라는 말이 남용되는 경향이 있다. 실력이 조금만 뛰어나면 서슴없이 고수라 자칭하기도 한다. 하지만 고수는 스스로 고수라고 말하지 않고 꾸준히 정진한다. 고수에게 있어서 완성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이 고수가 되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으니, 고수의 비법은 멈추지 않는 노력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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