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변신, 사계절 색깔 상징 이미지
사막의 고원 지방에는 무더위 뒤 엄동(嚴冬)이 닥치는가 하면 불타는 듯한 더위 뒤 얼음 속 같은 서늘한 밤이 닥치기도 한다. 혹서와 혹한을 완충시켜 주는 봄이나 가을이 없다. 이와 같은 냉혹한 자연 환경 속에서 자라난 아랍 사람들은 환대하다가도 약탈하고, 관대하다가도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곤 한다. 극에서 극으로 급변할 뿐, 중간적인 조화란 찾기 어려운 것이다. 이에 반해 추운 지방에서 흰색을 자주 보고 살아가는 북유럽 사람들은 내성적으로 침착하고 조용한 경우가 많은데, 이는 ‘사색, 평화’등 백색의 상징성과 관계가 깊다.
자연에도 변화가 있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그 변화는 인격 형성뿐만 아니라 인생관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사람들은 자연의 미묘한 변화에서 인생의 순리를 경험하고, 여러 가지 삶의 굴곡을 터득하기도 한다. 새벽녘 동트는 풍경과 한낮의 하늘 그리고 저녁노을 따위 하루 동안 변하는 톤의 이미지뿐만 아니라 새싹, 무더위, 풍요, 눈보라 등 사계절의 변화로부터도 그에 해당하는 이미지를 배우는 것이다. 신화적 사고에 있어서 사계절은 단순한 자연계의 순환이 아니라, 신의 주관 아래 봄을 시작으로 여름, 가을, 겨울이 순환된다고 생각했다. 이때 겨울은 죽음의 계절, 봄은 재생의 계절이다.
신은 생명의 잉태를 초록색 싹으로 보여줌으로써 봄이 되었음을 인간들에게 알린다. 녹색은 생명의 색이요, 안정의 색이다. 겨우내 메마른 대지를 뚫고 솟아나오는 것은 푸른 싹이기 때문이다. <산해경>에 나오는 동방의 신 ‘구망(勾芒)’은 허리 굽은 노파인데, 그 호칭은 생명력을 암시한다. 勾는 구부러진 모양이고, 芒은 식물이 발아될 때의 싹으로써, 초록은 출생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봄은 조어 ‘’에서 볼→볼옴→봄으로 변천한 말이다. ‘’은 ‘볕(陽)’과 어원이 같은데, 태양의 본뜻을 지니고 있다. 한자 ‘春’은 햇볕을 받아 풀이 돋아나오는 모양을 나타낸 글자이다. 풀은 태양의 열에 의해 나온다는 고대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봄은 생명의 탄생, 아름다움 등을 상징한다. 옛날 아들을 낳고자하는 집에서는 봄이 시작되는 입춘에 받아 둔 물을 아주 소중하게 여겼다. 부부가 이 물을 마시고 동침하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신 때문이었다. 입춘 때에 내리는 비가 만물을 소생시키듯이, 입춘에 받아둔 물은 생명을 탄생시킬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스 신화에서 봄의 신이 헤르메스인 것도 봄의 생명력을 보여주는 사례다. 헤르메스는 농업의 신이며, 농사는 봄에 시작되기 때문이다.
봄의 색인 녹색은 주로 사막지대에 위치한 이슬람 민족에게 생명의 색으로 통한다. 이들은 녹색에 대한 동경심이 매우 강하고, 녹색을 매우 중요한 이미지로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건축물의 정문이나 시가지의 중요한 요소요소에 녹색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녹색은 풍토가 건조한 사람들의 마음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는 색인 것이다.
생명 탄생은 새로운 출발의 상징성 또한 갖게 되었다. 고전소설에서 남녀주인공이 만나 인연을 맺게 되는 시간적 배경은 봄이었다. 헤어졌던 사람이 다시 만나게 되는 계절도 봄으로 설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춘향전>에서 춘향과 이도령이 처음 만나는 시기도, 그들이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계절도 봄이다. 또한 초여름을 ‘신록(新綠)의 계절’이라 부르는 것에서도 새출발의 상징성을 느낄 수 있다. 왕성한 성장은 여름이 되어야 가능하다. 여름의 원형은 ‘너름’인데, 너름의 어근은 ‘널-’이고, 날(日)과 어원이 같다. 봄이 태양의 영향을 받아 시작된 계절이라면, 여름은 태양의 계절로서 힘의 원천과 젊음을 상징한다. 젊음은 정열, 정열은 열기와 통하며, 그에 맞는 민족적 기질을 형성한다.
적도에 가까운 나라의 국민들은 대부분 라틴계이다. 그들은 따뜻한 색 계통을 좋아하는데 특히 빨강, 주황, 노랑을 좋아한다. 그 이유는 풍부한 태양광선에 의해 적색 시각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적도 아래에 위치한 케냐의 빛은 런던보다 2.2배나 강하게 내리쬔다. 이 강한 빛이 사람들을 태양에 순응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때문에 라틴계 사람들은 외향적이면서 솔직하고 충동적인 성격을 보여주며, 미래보다 현재를 중시하는 인생관을 가지고 있다. 미래에 대해 걱정을 하지 않다보니, 추운 지방 사람들로부터 낙천적이라거나 무사안일하다는 말 또한 듣고 있다.
여름의 상징적 특성은 혈기에 있다. 봄을 ‘태양의 빛’으로 비유한다면 여름은 ‘태양’ 그 자체이며, 봄이 ‘생명력’이라면 여름은 ‘생명’인 것이다. 중국에서는 선사시대 이래 붉은색을 생명의 빛깔로 알았기에, 좋은 일을 바랄 경우 반드시 붉은색을 썼다. 고분의 시신 옆에 붉은 흙이나 모래를 뿌리는 풍습도 그 때문에 생겼다. 잃어버린 생명을 이 세상에 다시 불러오려는 바람에서이다.
붉은색이 생명을 상징하는 것은 피(血)와 관계가 있고, 피가 넘친다고 하면 그것은 격정을 상징하게 된다. 따라서 여름의 색인 빨강은 패기를 표상하며, 격렬한 반항이나 도전을 상징하기도 한다. 참을 수 없는 무더위는 젊은이들의 자제력 없는 돌출적 행동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가을’을 사투리로 ‘갈’이라고도 하는데, ‘갈’이나 ‘가리’는 곡식단을 거두어 차곡차곡 쌓아올려 더미를 만든다는 뜻을 나타내는 ‘가리다’에서부터 생긴 말이다. 이로부터 ‘가을’은 농작물을 거둬들이는 때를 의미하는 ‘가을철’의 뜻도 아울러 가지게 되었다. 부여 고구려 마한 등 고대 국가는 추수에 감사하기 위해 영고 동맹 무천 등의 공동체 종교의례를 가을에 행하였다. 가을은 인간세상과 하늘이 감응하고 수호신 등을 섬기는 성스러운 계절임을 표상한 것이다.
세계적으로 가을 개념은 농작물과 관련이 있다. 유럽 언어에서 가을(autumn)이란 농작물의 추수와 연관되어 있으며, 많은 문화권에서도 다른 계절과 마찬가지로 식량 생산의 시기로서 가을의 중요성을 기리기 위한 종교적인 의식과 축제가 행해진다. autumn은 ‘증가의 계절’을 뜻하는 라틴어 auctumnus에서 유래된 말이다.
추수가 끝난 가을은 초목의 잎이 시드는 조락의 계절로서, 흔히 덧없고 허무한 감정과 비애로 표상되기도 한다. 유럽인에게 있어 생존을 위협하는 지루하고 혹독한 겨울의 전주곡인 가을이 반가울 리 없다. 그래서 유럽인은 가을을 우울한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나무에서 잎이 떨어지므로 가을을 ‘폴(fall)’이라고 부르는데, fall에는 조락, 쇠퇴, 죽음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
음양학적 사고에 의하면, 봄은 양기의 증장, 가을은 음기의 증장이다. 양기는 생명을 살리고 음기는 생명을 죽이므로 가을은 생명의 쇠퇴를 상징한다. 음양의 기능에 입각한 가을의 생명 쇠퇴 상징은, 원초적으로 가을철에 잎이 지고 풀이 시드는 자연 현상에 대한 감각적 체험에서 유추되었다.
조선시대에 형조(刑曹)를 추조(秋曹)라 한 것도 쇠락의 상징성을 보여준다. 형벌은 생명에 대한 제재로 죽임과 살림의 두 범주 중에서 죽임의 범주에 속한다. 따라서 이는 ‘음기=생명 쇠퇴’의 사고에서 유추된 상징인 것이다. 크리스트교에서는 가을이 순례(巡禮)의 시기, 최후의 심판을 의미한다. 겨울은 농경생활인에게 있어 우주론적 차원의 죽음을 상징하면서 동결과 폐쇄, 어둠 등을 상징한다. 가을을 ‘죽음의 징조’에 비유한다면 겨울은 ‘죽음’ 그 자체인 것이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지난 날을 뒤돌아보며 ‘인생 결산’을 하게 된다.
우리 풍속에 겨울의 시작인 음력 10월 보름을 전후하여 5대 이상의 조상들에게 묘제(墓祭)인 시향(時享)을 지낸다. 시향(시제) 때에는 가깝고 먼 친족들이 한 묘 앞에 모여 신곡과 햇과일을 차려 놓고 참례하는데 많은 자손이 모이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즉 가족의 수로써 ‘결산’을 하는 것이다.
겨울은 차갑고 냉혹하며, 겨울은 모든 것을 저 어둠 속으로 사라지게 만든다. 그래서 겨울의 느낌은 검은색으로 연결된다. 오광대 가면극 놀이에 나오는 흑제(黑帝)장군은 오행설에서 겨울을 맡는 신이다. 검정색은 햇볕을 가장 많이 흡수하기 때문에, 추운 겨울에는 검정옷을 많이 입고 따라서 흑제탈을 쓰는 흑제장군은 겨울의 신으로 상징된다.
서양에서는 미망인과 조객들이 검은 상복을 입는다. 검정이 애도의 빛깔로 표시된 것은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이 죽었을 때부터로 전한다. 죽은 자를 위해 검은 옷을 입게 된 것은 사후세계의 느낌과 연결되어 있다. 계절의 순환은 태어나고 떠나가는 인생살이와 다를게 없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어김없이 가을 겨울이 오듯이 인생도 보호받으며 성장하다가 절정기를 누리고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이에 맞는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 아름다운 생이라 생각된다. 비닐하우스 재배 과일보다 제철 자연 과일이 훨씬 맛있듯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는 변신은 생의 아름다움을 끝까지 유지시켜준다. 자연 앞에서 겸손함을 깨닫는 순간, 인간은 아름다운 변신을 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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